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안테 파벨리치 (문단 편집) == 생애 == 당시 [[오스트리아-헝가리 제국]]에 속해 있던 [[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]]의 블라디나에서 태어났다. 법률교육을 받은 후 [[변호사]]가 되었다. [[1915년]]부터 [[1919년]]까지 크로아티아 법률당의 서기로 일했다. 당시 러시아의 지원을 받은 세르비아는 슬라브 민족주의를 주장하며 모든 슬라브 민족들을 세르비아가 주도하는 유고슬라비아의 지배하에 두려고 하였다. 안테 파벨리치는 [[1919년]]에 [[크로아티아]]의 독립과 [[보스니아]] 및 [[달마티아]]의 병합을 주장하는 [[민족주의]] [[정당]] 프랑코프치에 입당하였다. 당시 당은 요시프 프란크가 지도했고 [[1919년]] 파벨리치는 당의 비서로 활동하나, 그와 몇몇 당원들은 정치적 사태로 체포되었다가 풀려났고 자신들이 체포된 것에 대해 부당함을 주장하며 소송을 걸었으나 패하였다. 후에 [[1927년]] [[자그레브]] 시의원으로 선출되었다. [[1929년]]까지 당내에서 비서로 세력을 잡으며 국왕의 독재가 강화되자 지하 비밀조직 [[우스타샤]]에 협력하여 조직을 이끌었다. 그리고 [[이탈리아 왕국]]으로 조직을 옮겼으며 [[1934년]] [[유고슬라비아 왕국]] 국왕 [[알렉산다르 1세]]를 암살하게 되는데, 이 때 [[유고슬라비아]] 정부는 그의 소환을 요청하지만, 이탈리아는 이를 거부하고 그를 잠시 형무소에 가두는 걸로만 마무리했다. 그리고 [[제2차 세계 대전]]이 터지고 [[유고슬라비아 침공|유고슬라비아가 점령]]되자 그는 그의 조직 [[우스타샤]]를 이끌고 크로아티아로 돌아와 [[나치 독일]]과 [[이탈리아 왕국]], [[헝가리 왕국]]의 지원으로 [[괴뢰 정부]] [[크로아티아 독립국]]을 세우게 된다.[* 마치 청나라에서 중국 한족들이 독립하기 위해 중국에 조계지를 설치하며 식민지배하던 서양 열강들과 손을 잡고 쑨원이 일본제국에 방문한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.] [[우스타샤]]의 수반이 된 파벨리치는 [[아돌프 히틀러]]와 만나고 히틀러와 크로아티아를 위해 [[유태인]], [[집시]], [[세르비아인]], [[공산주의자]]들을 대상으로 [[공포정치]]를 자행한다. 그가 세운 정책에 [[세르비아인]]들을 비롯한 타민족들은 반발하지만 파벨리치는 그들을 [[학살]]하며 더 나아가서 크로아티아를 [[가톨릭]] 국가로 만들기 위해 [[그리스 정교]]나 [[이슬람교]]를 믿는 국민들을 더욱 억압했다. 이런 상황에서 대표적인 투쟁 단체인 [[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]]과 [[체트니크]]가 활동하게 된다. [[4월 15일]]에 [[자그레브]]에 도착한 파벨리치는 다음날인 16일 스스로 수상 겸 외무장관의 자리에 올랐다. [[1941년]] [[4월 30일]] 국적법에 의해 모든 비슬라브인 시민은 [[무국적자]]가 되어 버렸다. 이 날 민족간의 결혼을 금지하는 법률도 만들었다. [[6월 4일]]에는 크로아티아의 사회, 청년, 스포츠, 문화조직, 문학 및 언론, 예술에 비아리아인의 참가가 금지되었고, [[크로아티아 독립국]]에선 세르비아인에 대한 [[대량학살]]을 실행하였다. [[1941년]] [[6월 15일]] 크로아티아 독립국은 [[삼국 동맹 조약]]에 가입하였으며, [[6월 26일]]에는 [[방공 협정]]에 가입하였다. [[12월 14일]]에 [[미국]]과 [[영국]]에 [[선전포고]]한 파벨리치는 [[1942년]] 9월에 독일을 방문하여 히틀러의 허가를 얻은 후 크로아티아의 제2인자이며 원수인 슬라브코 크바텔니크를 해임한 후 정부 재편을 실시했다. [[1943년]]에 이탈리아의 항복으로 형식상의 국왕이던 [[토미슬라브 2세]][* [[사보이아 왕조]] 방계인 아오스타 가문의 4대 공작인 아이모네, 1909~1948. 부인은 [[그리스 왕국]] [[콘스탄티노스 1세]]의 딸 이리니 공주(1904~1974)]가 퇴위했기에 파벨리치는 실세에서 명실상부한 1인 독재자가 되어 "수령"의 칭호를 얻었다. 그러나 이런 악행을 저지른 파벨리치는 결국 운이 다하여 [[1945년]] [[추축국]]이 패하자 [[오스트리아]]를 통하여 [[로마]]로 도망쳤다. 파벨리치는 유고슬라비아 인민재판소의 [[궐석재판]]에서 [[사형]]을 선고받았다. 파벨리치는 더 안전해지기 위하여 [[아르헨티나]]로 도망쳤고, 독재자 [[후안 페론]]의 고문이 되었다. 고문에 오른 파벨리치는 페론을 설득하여 크로아티아에 남아있던 [[반공주의]]자들과 자신의 동료, 부하들을 위한 [[비자]]를 발급해 총 34,000명의 [[크로아티아인]]들을 [[남미]]로 탈출시킨다. 이런 행동을 벌이면서 안전히 지내던 파벨리치는 [[1957년]] 2번의 암살 미수를 경험하며 유고슬라비아 UDBA의 조작으로 아르헨티나에서 추방된다. 갈 곳을 잃은 파벨리치는 이후 [[이탈리아]], [[아르헨티나]], [[칠레]], [[파라과이]], [[스페인]] 등으로 옮겨 다니면서 [[망명]] 생활을 하다가 [[1957년]] [[4월 10일]] 로마스 델 파로말에게 습격당해 중상을 입은 후 약 2년을 더 살다가 [[스페인국]] [[마드리드]]에서 [[1959년]] 사망한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